임인년(壬寅年) 새해 아침
일출의 전후는 쾌청하다는 일기예보에 서둘러 사우스웨스트 남서쪽, 유대인 CHEVRA CADISH CEMETERY 공동묘지 언덕에 서서 기도하며 마음을 가다듬는다.
인적(人跡) 의 흔적은 말끔히 지워진, 이 시간 드넓은 고요의 풍광이 성스럽다. 광야 저 멀리에서 포효하며 달려오는 호랑이 발굽 소리가 적막을 깨우고 있다. 범은 한민족의 기상, 체력이 쇠할 때까지 뛰는 영물이 아니던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 서곡의 웅장한 음악이 영상으로 펼쳐진다.
“그대들은 벌레로부터 인간에 이르는 길을 걸어왔고 많은 점에 있어서 아직은 벌레다. 일찍이 그대들은 원숭이였고 지금도 그 어떤 원숭이보다 더 원숭이다. 보라! 나는 그대들에게 초인을 가르친다” 니체의 외침이 광야에 선 예수의 외침처럼 들려온다.
지난 두 해 동안 뉴 노멀이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며 낯선 두려움의 울타리로 가두었다. 인간들은 희망을 잃은 순치동물로 전락하듯 길들여져 간다.
소는 가다가 지치면 풀석 주저앉는다고 한다.
나도 팬데믹 기간 희망이 옅어진 순간, 단테의 신곡 ’지옥의 문’ 유혹의 손짓을 본다. “여기 들어오는 너희는 모든 희망을 버려라!” 차라리 어디든지 달려가 쓰러지고 심은 유혹이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광야에 홀로 선 디아스포라 나그네, 자유가 없는 희망은 공허한 소망, 지금 바라보는 온 세상이 자유물결로 넘실거리는 환상을 본다.
희망을 상실한 곳은 지옥이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살 길이 있다고 했는데, 자유, 희망을 위해서 2022년 전력투구하며 맞서 싸우리라
여명의 낮꿈을 꾸고 있다.
두려움과 공포의 시작은 스스로의 이기적인 울타리 속에서 전염병처럼 번지는 것, 내가 세상을 향해 나의 주변에 무슨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스스로 문제를 던지며 해답의 본질을 찾으려 찬바람 맞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를 한다.
“주님 죽는 순간까지 ‘바쁨’의 축복을 주시되, 타자를 향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게 하소서”
영하 20도의 매서운 바람 때문인지 새해 첫 날, 이따금 공중 곡예를 보여주던 수백 마리의 참새떼 유희 모습은커녕, 어슬렁 거리던 코요테 무리도 종적을 감춘 채 주위가 온통 고요에 잠겨있다.
8시 40분, 동녘 지평선의 띠구름을 걷어낸 엘리오스의 햇살은 로키산맥을 향하여 레이저 광선을 쏘듯 일제히 품어대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유대인 공동묘지와 드넓은 텅빈 유채밭에 광명의 따사함이 내려앉는다.
햇볕은 어느새 살을 에는 혹한의 바람을 살포시 품고 백옥의 눈 속을 파고든다.
“오 주님, 성스럽고 신비한 풍광과 영성을 감당할 용기와 지혜를 주소서”
일출의 순간, 끝없는 들녘에 아주 고요한 희망의 황금물결이 일어난다. 출렁이는 바닷가의 일출과는 견줄 수 없는 로키산맥 신비로운 장관의 연출에 숨이 멎는다.
무아의 경지. 근심과 고뇌가 사라지며 마음이 뜨거워진다. 희망의 기운을 온몸으로 들이킨다.
새해 벽두 “오미크론은 전염성이 너무 강해서 세계 모든 지구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선언하는 세계의 유명 감염학자들이 전하는 기사가 도배질한다. 전 세계 모든 인류가 바이러스의 감염 위기에 노출될 것이라는 절망의 외침을 이겨내고 사랑의 기운을 휘감은 채 기쁨으로 출발하리라.
코로나 19가 종식되지 않은 채 맞이하는 2022년 새해 아침에도 희망은 살아 움직인다
희망은 깨어 있네
이해인
나는 늘 작아서 힘이 없는데 믿음이 부족해서 두려운데
그래도 괜찮냐고 당신은 내게 말하는군요
살아 있는 것 자체가 희망이고 옆에 있는 사람들이
다 희망이라고 내게 다시 말해주는
나의 작은 희망인 당신 고맙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숨을 쉽니다
힘든 일 있어도 노래를 부릅니다
자면서도 깨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