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야 김민식 (캘거리 문협)
노년의 가을느낌은 해를 더할수록 예민해 간다.
고독의 인생무상을 읊으면서 자기의 처지를 슬퍼하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그리움의 회한 때문에 가슴앓이를 하는 분들도 있다. 좀 여유가 있는 지인들은 언제나 가을에 먼 여행을 떠나 자신을 반추한다. 주위의 어떤 지인들은 남몰래 죽음의 치분한 준비를 시작하느라 애지중지 소유한 사물들을 과감히 버리는 계절도 가을이다.
나처럼 아직까지 힘든 일을 하는 처지에선, 여행을 다니고, 환경의 신세한탄을 할 수 있는 여유는 없다. 아직도 ‘삶의 사치’일 뿐이다. 오로지 20여 성상을 한 식당에서 생업과 씨름을 하느라, 고상한 삶의 여백을 발견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으리라.
빠른 세월만 탓하며 눈만 몇 번 껌뻑거렸을 뿐인데, 그사이 어머니와 형제들을 여의며 가슴 아파하고, 자녀들을 출가 시키느라 노심초사 분주한 세월때문에, 어디 제 정신의 삶이 있었을까? ‘이런 여유들은 허세’로 치부하며 살아온 인생이지만 후회는 없다.
초로(初老)의 가을맞이.
올해는, 별스레 긴긴 가을이 ― 나는 일교차가 심한 팔월 중순이면 밤새 군데군데 노란 저고리들을 입히느라, 아침 햇살엔 유난히 파르르 떠는 가게 뒤뜰의 지혜로운 70년생 자작나무에서 첫가을을 읽는다. 가을의 전령사다.― 겨울의 길목을 꽉 막고 접을 줄을 모르지만, 겨울의 정탐꾼은 야밤을 타고 진군하며 대지에 한파를 적시고 다닌다.
가을의 막바지, 오늘같이 맑은 날, 삶의 영글음 들이 나를 위로한다.
가슴이 찡하도록 저며 오는 감동들이 있어 모처럼, 삶의 여백을 찾아간다.
로키 산마루의 저녁노을― 인생의 저녁놀이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고즈넉하면서도 해맑고, 서두르지 않는 잔잔함 속에, 영글음의 축복이 어디서부터 오며, 가는 것인지 깨닫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삶이 아름다운 가슴 벅찬 날에는 서재에 오래 머물고 싶다.
찌들은 피곤에 스르르 눈이 감기기도 하지만, 얼마간의 정적이 흐르면 멀리 있던 그리운 것들이, 살포시 다가온다. 뒤안길 추억들이 가슴 그득히 채워지면, 비로소 텅 빈 가슴속에 영글어진 생기가 살아난다. 사유의 도약이 시작된다. 가난의 시절, 고통, 애통, 행복한 순간들이 영상처럼 떠오른다. 견디고 이겨내고 살아온 자신이 대견스럽다.
독서의 즐거움보다 음악을 감상하고픈 충동이 먼저 인다.
컴퓨터에 6개의 스피커를 연결한다. 맑고 고운 소리들이 사방에서 반향하며 서재 가득히 소리의 향연을 이룬다.
가을엔 먼~먼 태고의 사연들을 품고, 간절함을 담은 선율이 좋다.
조수미의 노래들을, Stephen Foster-Folk 합창들을 즐겨 듣는다.
천상의 소리들이란 이런 것일 게다.
조수미의 자장가를 특별히 좋아한다. 표현의 여백이, 끝없는 광야만큼이나 넓은, 긴 호흡으로 애절함이 넘친다, 한참의 침묵 후에 악기의 반주 없이 부르는 모차르트의 자장가는 단순한 성악가들의 자장가가 아니다. 어머니가 부르는 자장가 수준을 넘어선다. 벨칸토의 미학을 넘는, 어머니의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다.
새 집으로 이사 와서 첫 손자가 두어 살 때이던가?
아내와 딸은 서울로 여행 중 이었고 아들은 지방출장 중이라 너른 집에는 며느리 손자 그리고 나뿐이었다. 식당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자 며느리와 제대로 대면도 못하고 곧 잠에 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방문을 조금열고 잤다.
새벽녘 깊은 잠 중에서 천사의 노래 같은, 비몽사몽간의 고요한 음성이 들려온다. ‘잘 자라 우리아가 앞뜰과 뒷동산에.........잘 자〜거라’ 열이 펄펄 나는 손자를 포대기로 등에 업고는 애잔한 음률로 자장가를 부르고 있었다. 한참을 불렀나 보다. 그리곤 방으로 이내 들어간다. 아침에 손자의 열은 내렸는지 찐한 콧물만 흐른다. 아침밥상에서 손자의 한쪽 코를 막고는 한쪽 코는 며느리 입으로 간다. 쭉 빨아 입으로 삼킨다. 어머니의 어머니가 불렀던 노래의 힘이리라.
이 초로(初老)의 첫 가을을 보내면서 어머니의 어머니 노래, 음성을 더 듣고 싶다.
겨울엔 독서로 니체와 헤르만헤세를 깊게 만나려고 한다. 삶의 고통에서 터득한 영성의 세계, 경험담을 들으며 여생의 여백에 삶의 향기가 곁들인 사랑을 만들어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