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야 김민식 (캘거리 문협)
경자년 새해 아침,
절망과 희망의 경계선에서 묵상을 하며 희망의 참 의미를 깨닫습니다.
이제는 당당하게 희망의 노를 저어갈 수 있는 힘이 솟습니다.
나그네 인생 사반세기가 넘도록 희망은 디아스포라 꿈으로 가득찾습니다.
제트기류를 타고 나르는 초록빛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빛바랜 초록이 제야의 언덕에 서면, 희부연 안개처럼 잿빛만 어른거렸습니다.
종소리는 채찍의 종소리, 후회의 종소리, 그 소리가 두려워 일찍 잠이 들곤 했습니다.
허상의 요란한 꿈들이 용두사미처럼 슬그머니 사라지는 반복의 연속이었습니다,
희망을 향한 의지는 절망의 유혹을 떨치지 못하고 늘 맴돌았습니다.
이민 인생은 다 그런 것, 체념이 지배하는 사슬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몰랐습니다.
절망의 나락은 추락이 아니라 차라리 중력의 아늑함이었습니다.
어느 시인의 노래처럼 돼지가 삼겹살이 되어 힘이 다하는 날, 붉은 핏빛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도 웃음 짓는 연분홍 머리가 더 좋아 절망의 비애가 더 따스하게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희망의 토템 풀, 로키산의 보우 강도 절망의 무게 앞에서는 감당 수 없는 가슴의 폐허로 버려진 체 검은빛으로 고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세월은 절망 가운데서도 열심히 살아온 이민 인생 덕분에 희망의 실낱같은 끈 하나 쯤은 간직하고 있는 위대한 존재가 인생이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입니다.
살아서 견뎌낸 이민 인생이 아름답고 준엄하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혹독한 절망의 늪에서 노를 저어보지 못한 못한 인생은 희망의 참 의미를 알 수가 없습니다.
집 앞마당 찔레꽃은 가지를 잘라내고 척박한 환경일수록 가지가 왕성하고 꽃이 아름답습니다. 진한 향기를 품습니다.
토실한 빨간 열매는 비바람이 몰아치고 눈보라의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이듬해 철새들이 날아들 때까지 꼭 붙들고 있습니다. 철새들이 좀 늦게 도착하면 부지런히 새싹을 돋아내도 단단히 붙들고 있습니다.
우리 집 로빈 새도 찔레 열매로 배가 불룩하면 한참을 서성이다가 몇 일 후 다시 귀환합니다.
희망과 절망은 내 안의 마음 공장에서 같이 만들어지는 것, 절망이 외롭다면 희망은 더 외롭고 긴 여행이어서 종신형이라고 시인은 노래합니다.
절망의 긴 터널에서 방황을 할 때도, 터널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절망의 바닥을 체험하는 순간 공허한 공간 속을 탈출했습니다.
절망의 바닥은 오만과 욕심 거짓으로 가득 채워진 곳, 항상 생각이 복잡해서 피로합니다.
절망은 절망 자체이므로 속이지 않습니다. 희망은 가끔 가면을 쓰고 우리를 속입니다.
인고의 세월 속에서 터득한 희망은 진흙 속에서 장미꽃을 피우는 일이어서, 스스로 한층 가혹한 채찍을 들어야 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희망의 기쁨은 투명하고 마음이 가볍습니다. 단순합니다. 꼼수가 없습니다. 늘 버리는 일에 익숙해집니다. 의롭습니다 불의한 것을 참지 못합니다. 그곳에 희망의 샘이 솟습니다.
절망보다도 희망이 더 외롭고 긴 여정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는 사랑의 긴 강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러한 꿈이 있기 때문에 노년의 여생, 희망의 죄수로 살려고 합니다.
희망의 죄수 그것은 사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