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야 김민식 (캘거리 문인 협회)
새해 아침의 피시 크릭 공원, 길이 나지 않은 자작나무 숲을 걷는다.
사람의 발길이 닿은 흔적이 없는 것 같다. 태고의 생태 세계를 연상하며 길을 걷는다. 싱그럽다. 바둑판처럼 잘 생긴 숲이다. 인공 조림 숲이 아닌데 거문고 현 줄같이 늘어진 것이 기품도 있어 보인다. 숲 사이로 가냘픈 나무들이 군데군데 부러진 채 널려 있다. 부러진 나무들을 애처롭게 쳐다본다.
왜 부러졌을까. 부러진 밑둥치가 바짝 붙어 서로 생존에 불편한, 그중 연약한 나무들만 부러져 있다. 가녀린 소녀의 허리 같은 모양새로 보아 서로 가까이 붙어선 채 의존해 살고 있었을 것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행복해하고, 햇살을 먼저 볼 욕심으로 언제나 하늘을 찌르듯이 살고 있다가, 간격이 없는 사이를 미쳐 빠져나가지 못한 세찬 바람에 못이긴 것일까. 자작나무는 폭설에도 춤추듯 털고 우뚝 서는데, 사이를 털지 못한 눈의 무게에 부러진 것일까. 코요테의 추격에 놀란 사슴이, 나무 사이를 빠져나가다 부러트린 것일까. 공원 관리인이 촘촘한 사이를 넓히려고 부러트렸을 수도 있다. 한여름 건조한 나무의 마찰로 산불을 낼 수도 있으니까. 아무튼 자작나무 숲은 아름다운 간격의 여백을 만들며 오래오래 살고 있다,
부러진 나무들 숲을 헤치며 요리조리 빠져나가 아래 계곡에 이른다. 허리를 펴고 자작나무 숲을 올려 본다. 소나무 한 그루의 침범 없이 순수한 자작나무 나목 숲이 아름답다. 아침 햇살이 나목을 붉게 물들이고, 세찬 하늘 바람에 나무 가지들이 자유의 춤을 춘다. 바람과 햇살과 나무의 떨림이 어울리며 태고의 연주가 시작한다. 신비하다. 맑은 공기로 가득 채운 마음이 가볍다. 어깨의 짐마저 덩달아 가벼워진다.
긴 식탁 한구석의 바나나 한 송이가 바나나 걸이에 걸린 채 쓰러져 있다. 과일 바구니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지, 제법 오래된 것 같다. 한동안은 매일 먹었는데 식상한 것 같다. 식탁에 닿은 바나나 부분이 뭉그러져 있다. 걸이에 걸어 놓은 바나나는 오랜 시간이 지나면 겉껍질은 새까맣게 타 들어 간다. 그럼에도 속 과일은 맑은 공기가 흐르는 한, 검은 반점하나 없이 샛뽀얗게 익어가는 법이다.
새해를 전후해서, 새로운 모임과 일들이 늘어나 체력이 감당하기 힘들어진다.
엎친 데 덮친 격, 25년 만에 식당 실내를 바꾸었다. 인부 3명을 동원하고 젊은 실내 디자이너의 설계대로 공사 중인데 산듯하다. 몇 주가 더 걸릴 것 같다. 영업을 하면서 진행하느라 코에서 피가 줄줄 난다. 소독하지 않은 티슈로 코를 틀어막고막고 이틀을 지냈다. 두통이 오고 혈압이 높아져 응급실로 갔다. 코의 공기를 차단했으니 당연히 심한 염증이 생기고 고름이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듯 인생 삶에도 적당한 사이와 여백이 필요하다.
그 관계 사이로 신성한 공기가, 흘러가는 구름처럼 넘실거려야 한다. 그 사이로 냉철한 지성과 종교의 융합, 가벼운 예술의 창조 - 음악과 문학, 미술과 체육의 창작 활동이 어우러지면, 마음이 풍성해진다. 치우침이 없는 그런 분들의 옆에 서기만 해도 향내가 난다. 비록 작은 것들이라 하더라도 확실한 행복(小確幸)이 잦아들고 자유로워지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일을 구분하는 힘도 생활의 간격- 여백에서 시작된다.
하물며 이민 생활에서는 더 많은 삶의 평행이 요구된다. 자칫 방심하면 기울기 시작하며 깨어지며 썩기 쉽다. 때로는 혹독하게 혼자 지내며 즐기는 훈련을 통해서 이민 생활의 간격을 배우기도 한다.
아흔에 이른 지금에도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유카오 하사코의 2017년 작품<적당한 거리를 두세요>를 읽는다. 60여 년간 1만 건이 넘는 민사 소송을 통해서 복잡하게 얼킨 인간관계를 해결하는데 평생을 헌신한 분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분쟁이 불가는 하면 거리를 두라. 문제를 인식하는 관점이 바뀌고 관점이 바뀌면 신기한 일이 벌어진다. 지금까지 아주 크고 중요하게 느껴졌던 일들이 그리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분쟁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거든 이별을 선택하거나 새롭게 출발하는 것을 서슴지 말라 각자의 인생을 존중하고 거리를 두라......"
함께 있으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마라.
그러나 너의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두라.
............................
함께 서 있으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마라
사원의 기둥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라 수 없다.
칼릴 지브란, 『사랑을 지켜가는 아름다운 간격』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