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해년 새해 아침이다.
해가 뜨려면 아직 3시간이 남아 있다. 서재의 창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기해년에 출산한 아이는 복을 듬뿍 이고 산다는 속설 때문인가, 새해 아침의 찬 공기가 유난히 포근하다.
해마다 아주 이른 새벽 미명에, 창문을 여는 경우가 두 번 있다. 새해 첫날과 로빈 새가 돌아오는 이른 봄, 열흘 어간이다. 이민생활 중에 터득한 별스러운 행동이 사반세기를 이어오면서 습관이 되었다.
의지할 것이라고 없는 적막강산에서, 우여곡절을 빼곡하게 짊어진 이 육신을, 새해 새벽에 창문을 여는 순간, 고요한 바람이, 마치 늦가을 는개가 살갓에 촉촉이 스며들듯, 희망이 온몸을 적시며 찌든 영혼을 몰고 가는 환희가 있기 때문이다.
새해 첫날 새벽은, 찌든 것들을 말끔히 씻어 내려는 내면의 충동이고, 귀소본능의 로빈 새가 부활 주일 전후 열흘 정도의 어간에, 첫 노래가 바람결에 실려 올 때까지, 매일 새벽 창문을 열어 놓곤 한다. 새해 첫날 일출을 보는 기쁨보다, 며칠 동안 공중을 날며 절반 이상이 공중 맹수의 공격을 피해 살아 귀환하는 기쁨이 더 커서, 살아 돌아온 기쁨에 눈시울이 붉어지곤 한다.
묵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다, 일출을 보러 민둥산으로 올랐다. 순환 도로 공사의 끝자락 공사 때문인지 민둥산으로 오르던 익숙한 차도들이 이곳 저것 막혀있다. 미련하다고 놀려 대지만, 미로를 찾는 데는 특별한 재능을 지니고 있는 돼지처럼, 어둑컴컴한 임시 도로를 구불구불 곡예 운전하듯 용케도 간신히 빠져나왔다. 언덕 위에 주차한 것이 22X 길 옆 낯선 유태인 사설 공동묘지 입구이다. 헌화할 때면 생화 이외에 조화는 반입 금지라는 입구 팻말이 눈에 띈다.
서북 방향 하늘이 온통 옅은 먹구름으로 드리워있다., 남동쪽 하늘마저 덩달아 회색으로 가린 채 오늘은 일출 보기가 힘들겠구나 체념하며 홀로 서 있다. 새해에는 영하 10도를 오르내리던 날씨가 영하 4도를 가리키는 것도 이색적이다.
실망이 희망을 향해 질주한다.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인다.
남동쪽 하늘 높이 초승달이 밤새 지쳤든지 별 하나가 바로 옆을 굳건히 지켜주고 있다. 동쪽 지평선에는 구름 띠들이 일렬로 도열해 있고, 서쪽 하늘의 구름이 붉은색으로 변하더니, 로키산맥이 도열한 채 붉은 기운을 받아 팡파르가 울린다. 소리가 너무 요란해 고막이 찢어질 것 같다.
구름이 해를 가려도 여전히 해는 구름 뒤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는 자연의 준엄함 법칙을, 새해 아침에 배운다. 나는 굉음 같은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 같기도 하고, 전광석화와도 같은 빛은 넓은 메밀밭이, 순식간에 황금빛으로 물들이더니, 황금 동산으로 변한 하나님의 솜씨가 아름답다. 하나님의 동산 속에서 묘지의 비석이 반짝거린다. 달과 별이 이내 사라진 온 하늘은 파랗다.
귀에 익은 듯 자작 낭송을 한다.
해야 솟아라
맑고 고운 해야 어서 솟아라.
구름 띠 걷어내고 어둠을 헤치고 솟은 해야
내 안의 검은 띠 걷어내고 희망의 빛으로 물들여라
가슴이 뜨거워 질 때까지 종일 솟아라
60년 만에 돌아온다는 ‘황금 돼지의 해', 육십 갑자로 펼친다면 돼지띠 기해년이다. 12년 전, 청해 년 돼지띠가 바로 엊그제 같았는데 유수 같다. 오늘에야 인생의 철이 들기 시작하나 보다.
이 순간, 마음속 가치의 추구가 외적 가치를 누르고 일어서고 있다.
마치 인생의 끝에서 서 있는 것 같아, 나의 관심은 온갇 시름을 잊고 순수한 존재의 근원을 찾아 간다.
그릿(Grit; 기개): 나는 노년에서야 나의 '회복 탄력성'을 믿는다.
이민의 삶에서 넘어지고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는 힘을 새해 아침에 배운다.
덕워스 교수는 '기개'란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열정과 끈기라고 했다. 해가 뜨나 해가 지나 꿈과 미래를 물고 늘어지는 힘이라고 했다.
노년, 내면의 영글음을 향해 달려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