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야 김민식 (캘거리 문인 협회)
가을은 사유의 계절이다.
수많은 고통과 시련을 불현듯 만나, 처절하게 고민했던 순간들을 되짚어 보고, 세찬 고통의 강물을 어떻게 헤치며 빠져나왔는지, 지나온 인생을 한 번쯤 되돌아보는 계절이다. 견디어 온 자신을 고양 시키고 승화 시키는 기회로 만드는 계절 또한 가을이다.
언어와 화폐 그리고 음식 문화가 다른 '낯섬' 들을 만나는 순간부터 시작된 힘겨운 삶들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도, 견디어 낸 축복들을 헤아려 보려, 고요한 밤에 서재의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또다시 머리를 숙인다. 눈시울이 뜨거워 오며 감사의 기도가 시작된다. 견디어 낼 의지가 약했더라면, 즐기는 인생을 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인생의 뒤안길을 걸어가면서 나의 운명을 학대하며 여생을 살고 있었을 것이다. 즐긴다는 것 자체가 나의 운명은 아닌가 보다. 견디다 보면 즐거움과 환희가 따라오는 것이다. 때로는 감당할 수 없는 축복과 기쁨도 누릴 수 있다. 나는 이 운명조차도 사랑한다.
지나온 인생 여정에서 경험한 지혜를 믿기 때문에. 나를 신뢰한다. 나를 믿고 의지하되 의존해서는 안된다고 자신을 추수린다. 의지가 이기적이면 여생을 견뎌낼 힘이 없어진다. 고통이 삶의 어머니인 것을 체험한다. '자기 신뢰'는 건강한 인생이 평생 품고 가야만 하는 생명의 확신, 생명줄 같은 것이다. 자신을 굳게 믿고 의지하는 것이 신뢰다. 지금까지 살아온 험한 인생 역정(歷程)들이 내면 깊은 곳에서 정제되어 만들어진, 자신만의 노둣돌 같은 것이다. '견뎌냄'에서 잉태한 것이다. 노듯돌은 말에 올라탈 때 꼭 필요한 발돋움 용으로 대문 앞에 놓인 돌, 옛말이다. 나에게 시련과 고통이 끊임없이 엄습하여 감당하기 어려울 때, 삶이 절박할 때, 나는 나의 노듯돌을 의지하며 일어섰다. 내가 더 살아야 할 이유, 나를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는 한, 나는 나의 노듯돌을 사랑한다. 그것이 마이 웨이(my way)다.
'견뎌냄'의 힘과 용기는 어디서 오는가
나와 사람, 하나님, 자연의 관계 사이로 늘 신선한 공기가 흐르도록 하는 데서 출발한다. 신선한 공기는 예술 같은 것. 음악과 문학, 운동의 강물 위를 노니는 보편적 지혜를 필요로 한다. 강물 위를 노니는 기초적인 예술 활동조차도 셀 수 없을 만큼의 또 다른 고통이 따른다. 예술 활동이란 즐기는 취미로 출발하지만 건강한 삶을 견뎌 내기 위한 또 하나의 고통이 따른다.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생각들이 문득문득 솟구친다. 생업을 위한 전문가가 아닌 한 범인(凡人)이 지나치게 어느 한 곳에 치우치면 막히고 썩는다는 지혜도 견뎌냄에서 배운다.
오늘은 10월 둘째 주 토요일, 세 곳의 모임에 약속을 했으니 새벽부터 분주하다. 거실 화초ㅡ 방울토마토, 콩 심은 화분들에 아침 일찍 물을 주었다, 가을 서리를 염려해서 8월 말 텃밭에서 화분에 담아 거실로 옮겼다, "할아버지 이것 키워줘" 손자 두 녀석이 방학 과제물로 받은 손바닥만 화분에, 콩 토마토 모종을 내던지 듯 놓고 간 것을 텃밭에 심었다., 병치레하는 두 달 동안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잎은 누렇게 말라 병들어 있었고 빨간 방울토마토 몇 개와 콩깍지처럼 변한 콩 알갱이 두 개 가 댕그라니 걸려 있었다. 잎을 모조리 제거하고 가지치기를 하니 앙상하다. 이제는 콩 씨앗에 새 삯이 돋았고, 토마토는 떼어낸 잎마다 새 순이 돋아 고운 연두색 빛깔이 눈부시다. 두 달 넘게 만발한 수국과 어울려 거실은 온통 봄 노래가 한창이다.
집을 나와 다운타운으로 차를 몰았다 이 넒은 도시에 모임 장소가 인접해 있어 천만다행이다. 오전 눈보라가 세차서 시야가 잘 보이지 않는다. 마치 안개 자욱한 길을 달리는 기분이다. 아직도 가로수 나뭇잎들이, 더러는 물들지 않은 것들이 푸릇푸릇해서 좋다. 오늘 아침 모처럼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다.
음식점 연회실을 꾸며서, 20여 명이 초대된 결혼 예식장이다. 사방에 생화로 장식된 꽃향기가 상그럽다. 양가 부모 친척과 가까운 친구 만 초대된 모임에 주례 목사도 젊다. 작년 10월, 어느 토요일에도 헤리티지 파크 조그만 카페에서 초대된 결혼식에 이어 두 번 모두 참석한 노인은 나 혼자라 꼄연쩍다. 초대의 전화를 한 신랑이 누구인지 가물가물했는데, 2년 전 술 취한 30대의 낯선 청년이 늦은 밤 가게로 불쑥 찾아왔다. "청야님, 죽고 싶습니다. 나처럼 교회 봉사 많이 하고, 오직 예수님 만 바라보고 교회에서 살았는데 되는 일이 없습니다." 할 말을 잃고,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때 당황해서 궁색한 답변을 한 것 같다. "예수가 신바람이 나서 자네를 도와줘야 하는데, 예수가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 같네. 예수는 의지해도 너무 의존하지 말게, 예수에게 너무 부담을 지우지 말고 살아야 될 이유가 무엇인지 성찰하고, 자신을 신뢰하게, 그러면 운명을 사랑하게 되고... 삶을 좀 더 옥죄고 팍팍하게 관리하면 그때 예수가 기쁜 마음으로 찾아올 걸세. 자네는 지금 젊음이 있기 때문이야" "지금은 아내와 맞벌이 덕분에 집도 사고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때 생각이 바뀌어 제 운명이 바뀌고 운명을 사랑하게 됐습니다. 나의 일에 전심전력하고 있습니다." 시련을 견디고 난 후의 가슴 벅찬 고백에 나는 눈시울을 훔쳤다. 다음 일정을 핑계로 조용히 예식장을 빠져나왔다. 아직도 중년인 신랑 부모가 어느새 지하 주차장까지 따라와 한참을 포옹하며 헤어졌다.
남궁 창 장로 장립식에 참석했다. 많은 하객이 참석해서 축하해 주었다. 안수집사로 취임한 김 창배 집시가 진수성찬의 비용을 전액 부담했다고 광고했다. 남궁 창 장로 부부의 그간의 행적 ㅡ 두 내외 모두 심장 병과 뇌질환의 고통 속에서도 수술과 치료를 병행하며, 견디어 내고 일어선 것이다. 김 창배 집사의 굽힐 줄 모르는 삶의 전력투구는 먼 발치에서 소문만 들어도 위안을 받곤 했는데, 충만한 기쁨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리라. 나오면서 한 청년에 물었다. "남궁 창 장로님을 사랑하나요?". "네,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시련과 고통을 견뎌낸 빈 마음속에 젊은이들의 존경심이 자라 잡고 있었다.
한국인 화가 4분이 참석한 '무명 60인 미술 전시회' 관람을 했다.
고 성복 화가는 같은 칠순의 고향 후배라, 호형 호재 하며 지내는 스스럼없는 사이다. 오랜만에 만났다. 고통사고 후유증으로 오랜 세월을 견디며 지냈는데 그림 활동을 시작한 후, 더욱 건강한 모습으로 조우하니 감개가 무량하다. 출품한 작품 모두가 내면의 고독함 들을 표출한 소재라 한참을 서성이다가, 한 점을 구매했다. 그는 문인으로 우리에게 더 친근하다. 깊은 철학과 인문학적인 고뇌를 담은 그의 수필과 단편 소설 작품들이 신문에 발표될 때마다 나는 몇 번을 반복해서 읽곤 했다.
가게 일을 마치고 늦은 밤, 하늘이 맑게 갰다. 얼마 만에 바라보는 반달과 해맑은 별빛인가.
오늘 따라 반달이 유난히 크다. 고통과 시련의 이민 생활 속에서도 좁은 길을 걸어가며 봉사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만나며 배웠던 오늘 하루도 감사하다. 천국 생활도 이랬으면.........